2023. 6. 18 (일) // 폭염이 작열하는 주말 오후, 능소화가 붉게피는 달성군 묘골마을을 찾아보았다
오늘까지 4번째 찾아가는 묘골마을은 사육신에 얽힌 사연들과 박팽년의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육신사(六臣祠)가 있는 묘골마을에 얽힌 "박비(朴婢)" 내력을 살펴보자
※ 1456년 6월 사육신을 포함한 충신들이 피바람 속에 숨져간지 몇 달이 흐른뒤인
그해 늦가을,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리의 교동현감 댁에서는 두아이가 태어났다.
한 아이는 박팽년 대감의 손자였고 또 한아이는 그 댁 노비의 딸이었다.
핏덩이를 안은 박팽년 대감의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는 만감이 교차했다
시할아버지 박중림과 시아버지 박팽년의 5형제, 남편 박순을 포함한 3형제까지
집안의 남자 9명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집안의 여자들은 관노비가 되어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아버지인 교동현감 이철근의 친정댁으로
관노비로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큰 행운 이었다.
“아이가 사내면 죽이고 계집아이면 관노비로 보내라” 는 나라의 서슬퍼런
엄명이 떨어져 걱정이 태산 같은데 마침 친정댁의 한 노비가 비슷한 시기에 딸을 낳았다.
며느리는 무릎을 치며 서로 아이를 바꾸면 이 아이는 죽음을 면하리라...박팽년 대감의 손자는
이렇게 현감댁 노비의 아들 “박비” 라는 이름으로 그 질긴 목숨을 잇게 되었고
성종대에 사면을 받은후 560년이 지난 지금까지 박팽년 대감의 후손을
20대나 이어올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에 의하여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키워진 이 아이가
17세 되었을때 그의 이모부 이극균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처가에 들렀다가
성장한 그를 보고 자수를 권하였고, 서울로 올라간 박비는 성종대왕으로부터
사면을 받게 되었다. 박비(朴婢)로 불렸던 박팽년의 손자는 성종으로부터
박일산(朴一珊)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후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묘골에 종택을 지으면서 후손들이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을 세운 박팽년 대감의 유복손 박일산이 외가집에서 태어나 노비의 신분으로 살아남은 것인데
그때 태어난 곳이 바로 이곳 묘리마을이다. 17년후 성종으로 부터 사면을 받고 후손이 없는 외가집의 재산까지
물려받아 지금의 묘리마을을 이루었으며 그 후손들이 단종복위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6분의 위패까지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는 육신사(六臣祠) ... 능소화 붉게핀 마을을 돌아보며 시간여행을 마친다
※ 박팽년 대감, 세종때 급제하여 성삼문과 함께 세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세조가 즉위하자 단종복위사건을 도모하다 처형을 당하게 되었다
박팽년 대감과 삼형제 3명, 부친과 삼촌들 5명, 할아버지까지
가문의 남자 9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죽음을
불사한 대감의 정신과 가치관은 무엇일까
... 긴 화두를 던져보며 ...
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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